성지순례

40.베드로성당

이경숙 0 3,308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약탈과 파괴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재건축 역사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아직 건축 설계의 경험이 적을뿐더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브라만테가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설계했던 성당을 다시 원래의 모습인 라틴형 십자가형태로 바꾸고, 돔의 위치도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세우도록 설계를 수정했다.

바로 이 시기에 커다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성당공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주교좌 성당문에 95개의 조문을 내걸고 로마 교황의 교도권에 항의했던 일과, 두 번째는 1527년 란치케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의 로마 침입으로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많은 피해를 입은 일이다.

그 후 1534년,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즉위하면서 공사를 재개(再開)하였다. 상갈로의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조수로는 야고보 멜레기노가 임명되었다. 1538년까지는 대성당을 받쳐줄 벽면 기둥들을 세우는 데만 주력하였다. 공사는 계속 활발히 진행되었고 1546년 8월3일, 공사 감독인 안토니오가 죽기 전까지는 눈에 뛸 정도로 공정이 진척되어 있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한 살로 고향인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사해 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 전체에 나 있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공사 총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신이 보내 준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임자였던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나무로 만들어 놓은 돔의 조형과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임자 안토니오의 모든 설계를 비판하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설계대로라면 불필요한 내부, 외부 기둥이 너무 많고, 건축에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그의 설계대로 공사를 계속할 경우엔 앞으로 50년 이상은 더 걸려야 했으며, 공사 비용 역시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미켈란젤로는 자기 자신의 이상대로 설계하게 된다. 그의 설계에 따르면 대성당의 규모가 다시 축소되고, 돔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서는 브라만테의 설계도로 되돌아가 대성당의 돔은 나무로 그 모형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토니오의 설계에 따라 이미 건축된 건물의 3분의 2에 가까운 부분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데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교황 바오로 3세의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그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게 된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서거로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된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되나, 새 교황 줄리오3세가 전임 교황의 신축 대공사에 관한 특별 담화문을 재확인하는 배려로,그의 남은 여생을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어쨌든, 미켈란젤로의 건축 설계도는 브라만테의 설계, 즉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와 아주 가깝게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돔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2월, 아흔이 다 된 노장 미켈란젤로가 운명하기 직전, 탐부로는 완성되었으며 이제는 그 위에 이미 설계를 마치고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던 돔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미켈란젤로의 사후(死後), 이 역사적인 대공사는 잠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5년, 훗날 역사가들에게 도시 계획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교황 식스투스 5세(1585-1590)가 즉위하면서 공사는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갔다.

미켈란젤로의 후계자였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그의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의 지휘 감독 아래, 600여 명의 인부들이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한 결과, 1588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이 거대한 돔은 완공되었다. 공사의 지휘 감독이었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설계 모형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다만 그 높이를 몇 미터 정도 더 높게 수정하였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가 새 교황에 오르면서 대성당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게 된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이전의 교황 레오 10세가 원했던 것처럼 새로 짓는 대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이 위치해 있던 전 지역을 포괄하여 신축되기를 원했으며, 이에 따라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를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원래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한 성당 크기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게 확장하도록 결정하였고, 1606년 3월 29일 수요일, 이와 같은 결정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성당의 골격들은 모두 헐리고 만다. 그리하여 대성당의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확장을 위한 새로운 설계도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것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확장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새로운 설계도에 대한 많은 비판이 주변에서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설계자 마데르노에 의해 1607년 11월 5일 시공되었고, 1608년 2월 10일에는 대성당의 정면에 사용될 초석이 축성되었으며, 1614년에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이 완공되었다.

이렇듯 과감하게 확장된 부분의 내부 설계에서, 마데르노는 전임자 미켈란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설계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의 풍으로 설계했다. 그 결과, 현재의 대성당에 들어가 보면 어느 한 구석도 조화를 이루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한 사람의 설계로 이루어진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이 사실이다.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자 그 뒤를 바로크 예술의 대가 잔 로렌조 베르니니가 이으면서, 신축 대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베르니니가 해야 될 일은 전임자들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의 내부를 좀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즉 전임자들, 돔을 중심으로 한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마데르노의 확장된 설계를 가지고 어떻게 잘 조화시키면서 내부 장식을 하느냐에 그 중심 문제가 달려 있었다.

시대적으로는 이미 바로크 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 데 반해, 대성당의 거의 대부분은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조화시키면서도 접목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였다고 훗날 베르니니는 그의 전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대성당 내부에서 잘 볼 수 있는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세운 4개의 청동 기둥과 그 천정 덮개,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중심이 바로 제대 밑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돔의 중심에 일직선으로 이어지도록 고안한 점, 또한 십자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은 베르니니의 위대한 예술적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대성당의 중앙 통로와 그 바닥은 모두 대리석을 사용했고, 대성당 내부의 양쪽 통로들 사이에 마련된 소제대들의 장식은 붉은색이 드러나는 천연 대리석을 사용하는 등, 현재 우리가 대성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부분의 것들이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42년부터는 그의 전임자 마데르노에 의해 완공되었던 성당의 거대한 정면이 본체가 되는 대성당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면 양쪽에 새로운 종탑을 세우면서, 전체적인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진 대성당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처음으로 성당(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을 세우고 축성한지 1300여 년 만인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새롭게 축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06년에 시공한지 꼭 120년 만에 축성하게 된 셈이다.

1656년에서 1667년까지 대성당 정면에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광장 역시 베르니니가 구상하고 완공하게 된다. 그 이 광장을 구상할 때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광장의 양 옆에 있는 같은 모양의 타원형 회랑은 그리스도가 팔을 벌려서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감싸 안아 주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설계했다.

 성베드로 대광장

베드로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운 것이다. 흔히 바로크 예술하면 복잡하면서도 장식적인 것으로만 연상되는데, 사실 그 시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대광장의 양쪽에 위치 해 있는 회랑을 살펴보면, 단순한 균형미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시대의 예술가로서 그 시대의 유행이나 사조(思潮)에 예속되지 않고, 항상 더 나은 이상을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대상을 항상 교회를 중심 테마로 잡은 베르니니의 예술 세계를 이 회랑을 통해 볼 수 있다.

광장은 그 폭이 246미터, 광장의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 미터나 되며,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나 된다. 그 위에 140개의 대리석상(주로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임)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 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 팔을 상징한 것이다. 베르니니는 양 팔을 벌리고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종교나 종족, 언어, 관습 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초대한다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벨리스크

광장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던,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기에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다. 이를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 일 후 같은 해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탑들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된다. 이 거대한 탑을 옮기기 위해 그 당시 건축 설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그의 지휘로 900여 명의 인부와, 말 140여 마리 그리고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하여 이 어려운 이전 작업을 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이 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가 권력의 상징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이 오벨리스크 탑을 이곳 광장의 중심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장식하거나 해시계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보다는, 더욱 심층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두 개의 분수


오벨리스크 탑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두 개의 분수대가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른쪽의 분수대는 카를로 마데르노(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사람)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오벨리스크 탑 이전 공사의 책임자)의 것이다. 이 두 분수대 역시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세워졌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순례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자신의 머리 위에 뿌린 후 성당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대성당 정면


이 정면의 규모를 수치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높이 45.44미터, 넓이 114.69제곱미터라는 전체적인 규모에, 높이 27미터, 지름 약 3미터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8개가 세워져 있다. 그 정면 바로 윗 부분의 중앙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열한 제자의 대리석상이 있는데, 그 석상의 높이는 6미터에 달하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바울은 광장 양면에 있다. 정면을 바라보면서 가장 오른쪽 끝에는 유다 대신에 제자로 뽑힌 사도 마티아의 석상이 서있다.


 입구의 대회랑

길이 71미터, 폭 13미터, 높이 20미터의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회랑 역시 대성당 정면의 설계자였던 마데르노가 설계했다. 설계자 마데르노는 여기에다 초기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의 입구 천장의 장식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지금은 거의 다 없어진 초기 대성당의 한 부분을 간접적이나마 볼 수 있다.

이곳의 바닥 중앙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선포한 교황 요한 23세를 기념하기 위한 교황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문양되어져 있다. 입구 내부에서 오른쪽으로 위치해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리석상은 베르니니가 1654년에 시작해서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며, 그 반대편에 있는 카를로 대제의 대리석상은 1725년 코르나키니가 완성했다.


 다섯개의 문


성문

이 입구의 내부에는 5개의 청동문이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다. 제일 오른쪽의 청동문은 성문(聖門)이라고 불린다. 이 문은 카톨릭 교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대잔치인 정기 또는 임시 성년의 개막 미사 전에, 교황에 의해 1년간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현재의 이 성문은 1950년 정기 성년식 선포를 기념하기 위해 스위스의 카톨릭 신자들이 기증했으며, 비코 콘소르티가 청동으로 제작하였다. 이 성문은 성년의 중심인 전대자가 전체의 큰 주제를 이루며, 이를 위해 성문 표면의 16군데 패널 위에 성서 이야기를 각각 소주제로 부조해 놓았다.


성사의 문

이 성문의 바로 왼쪽에 위치한 문은 '성사(聖事)의 문'이라고 불린다. 이 문 역시 1950년 정기 성년식 선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중앙문

다섯 개의 문 중 가운데 있는 중앙 정문이 유일하게 옛 성당 때부터 있었던 청동문으로 피렌체 사람 안토니오 아베룰리노가 1455년에 제작한 것이다. 이 중앙 정문의 표면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위쪽에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에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이 부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강복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성모 마리아는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우뚝 선 모습은 거룩한 교회 안에 양 기둥이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왼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모습이 성서 안에, 즉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세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도의 순교를 의미하며, 두 번째는 사도가 되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 지도층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녔을 때의 신분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신자답게 성령으로 무장하여 영적 투쟁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선악의 문

이 중앙 정문의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은 '선과 악의 문'이라고 불린다. 이 문은 1977년 9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의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봉헌된 것이다. 이 문에 부조된 조각은 그리스도의 이성론(二性論)에 의한 선과 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청동문의 오른쪽 면에는 선(善)을, 왼쪽 면에는 악(惡)을 상징하는 것들이 부조되어 있다.


죽음의 문

마지막으로 이 선과 악의 문 왼쪽에 있는 다섯 번째 문에 대해 알아보자. 이 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교황 요한 23세(1959-1963)의 요청으로 금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조각였던 자코모 만추가 제작, 설계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란, 곧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초세기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르쳐왔던 진리 중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문의 중심 내용은 죽음의 성화(聖化)에 대한 것이다. 이 문의 안쪽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그 내용으로 하여 부조되어 있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할 경우, 죽은 이들의 관이 이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새로 이 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 중심 내용을 죽음에 맞추었고, 이 문의 이름도 '죽음의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성당 내부

우리는 먼저 성당의 규모에 의해 압도를 당한다. 대성당이 세워진 대지는 모두 25.616제곱미터(약85,000평)에 달하며, 중앙 통로의 길이는 187미터, 폭은 140미터, 높이는 46미터이며, 중앙 제대 위에 있는 돔까지의 높이는 137미터이다. 또한 대성당 내부에는 모두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가 있으며, 395개의 조각과 135개의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내벽과 돔 안쪽에 장식되어 있다.

1700년대의 건축 비평가였던 밀리치아가 대성전에 대해 평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처음 대성당에 들어오면서 외부에서 받았던 성전의 거대함으로 인한 위압감이, 내부의 잘 조화된 모습들로 인해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형의 바닥 대리석

교황 아드리아누스 1세의 교황 칙서에 따르면, 772년 성주간에 이곳 로마를 방문했던 프랑스의 왕 카를로 대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카를로 대제는 말에서 내려 그들과 같이 교황청으로 행렬지어 들어왔다. 당시에는 왕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다는 점은 교황에 대한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도착한 왕은 기다리고 있던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시대의 성지 순례자들이 흔히 입던 옷으로 바꾸어 입은 후 교황의 성좌 앞에 놓여 있던 계단마다 입마춤을 하며 올라갔다. 그 후 800년 성탄 자정 미사 때에 바로 이 자리에서(당시 성당에는 이 자리에 임시 제대가 놓여져 있었다고 함)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왕관을 머리에 받는 대관식을 하였으며, 이런 행사는 1451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 때까지 지속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1475-1564)는 그의 나이 25살 때에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 (피에타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임).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들 예수님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모님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이유를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카우디비가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스카니오,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정결한 여자들은 무릇 그 정결함을 고귀하게 유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동정녀로서 잉태하신 성모님의 정결함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처절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분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심의 성찰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재조명해 보면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그저 조각가나 건축설계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바탕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러기에 몇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이적인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예로니모의 제대

제대 뒤편의 대형 모자이크는 예로니모 성인의 마지막 영성체를 주제로 한 것이다. 예로니모 성인(347-420)은 4세기 때 교황 성다마소의 비서로 지내다가, 384년 베들레헴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하며 당시 히브리어로 씌어 있던 구약성서 전체를 라틴어로 완역했는데, 이를 일컬어 '불가타(Vulgata)' 역이라 한다. 또한 그는 카톨릭 교회의 추앙받는 교회 박사들 중 한 분이기도 하다. 예로니모 성인의 무덤은 현재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에 있다.


 사도 베드로의 성좌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가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초세기 때부터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청동 의자의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마치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 안의 중심에 비둘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비둘기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의미한다.

타원형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또한 타원형의 둥근 모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삼위일체, 즉 3이라는 숫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모든 숫자 중 가장 완벽한 수를 3이라고 한다.

이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있는 청동상들을 보면, 앞쪽으로 미트라(Mitra:카톨릭 교회에서 주교들이 미사 중에 쓰는 모자)를 쓰고 있는 청동상은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 4대 교부(일명, 교회박사라고도 함)에 속하는 분들이다. 뒤쪽으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아타나시우스로서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4대 교부에 속한다.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들고 있는 교부들의 모습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들이 표명하였던 그들의 교부학 이론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이는 다시 사도 베드로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의 사실들은 변경되거나 바뀔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로는 갈라진 두 교회(동방과 서방)가 일치를 이루어야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니니의 신앙을 기초로 한 예술적 표현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새롭게 조명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왼쪽 대회랑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대성당 중앙 제대의 왼쪽 부분에 해당되는 이곳이 네로 경기장의 한 부분이었고, 이곳에서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거짓의 제대

이곳의 제대 위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그 내용을 성서의 사도 행전에서 본떴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안에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所有)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聖靈)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魂)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 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屍身)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葬事)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試驗)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葬事)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데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사도행전 5:1-10


이 일은 비단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작게는 우리들의 가정, 지역 사회 공동체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이 모자이크를 제작해 놓았으며, 제대의 이름 역시 모자이크의 내용과 일치하는 '거짓의 제대'라고 명명하였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제대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變形)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草幕)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忽然)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마태 17, 1-6)

이곳에 있는 모자이크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였던 라파엘로(1483-1520)가 다볼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소재로 1517년에 작업하여, 그가 죽던 해인 1520년에 완성한 마지막 유화 작품(원화는 바티칸 박물관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음)을 본 떠서 모자이크로 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그려진 부분은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마지막인 아래 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눈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있다. 단지 어린아이 한명만이 옆눈으로 보고 있는데,이는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 당시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작가는 무릎 꿇은 여인을 그려 넣음으로써 교회를 나타냈고, 죄악에 물든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와 신뢰, 그리고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


 성베드로의 청동상

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특히 이 청동상의 발에 입맞추며 기도를 바치는 전통 때문에, 현재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그 원 모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이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베르니니의 천개

이 천개야말로 베르니니의 작품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속의 양은 211,427파운드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양이 부족하자, 마침내는 로마에 있는 기원전 1세기 때의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도 성베드로의 무덤


중앙 제대 아래쪽의 작은 벽감 안에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58)가 봉헌한 것인데, 그 안에는 교황 리노(제2대 교황으로 사도 베드로 다음의 후계자임)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오는 영대(카톨릭 교회에서 미사 전례 때에 사제가 장백의 위에 걸치는 것으로, 이는 사제의 직분을 나타낸다. 그 위에 6개의 검은 십자가가 수 놓여져 있다)가 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선정된 주교나,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각국의 주교단들이,사도의 대리자로써 자신들에게 맡겨진 목자의 직분을 충실히 하며, 교계 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거나 갱신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6세기경부터 생긴 교회의 전통으로서, 전세계 그리스도인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성직자, 수도자 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과 함께 하나의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앙 제대 주변의 4개의 대리석상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네군데에 커다란 대리석상들이 있다. 이 대리석상들은 성녀 헬레나, 성녀 베로니카, 성안드레아, 성론지노등의 석상이다.

이 4개의 대리석 위쪽을 보면 사도와 성인들의 상징인 십자가, 베일, 창들을 천사들이 잡고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그 안에는 예루살렘에서 성녀 헬레나가 직접 가져온, 예수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의 일부분과, 성녀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 준 베일의 일부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다음 사망 확인을 위해서 당시의 검시관이었던 론지노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전해 오는 원래의 창이 각각 그 속에 넣어져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었던 사도 안드레아의 두 개골은 1400년 그리스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이 두 개골은 1966년 다시 그리스의 파트레에 있는 성안드레아 성당에 보내졌다. 이는 교회의 일치를 원했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순 마지막 시기인 성주간 동안에는, 현재 베로니카 성녀상 위쪽에 있는 소성당에서 앞서 말한 십자가, 창, 베일 등의 유품이 일반 신자들에게 특별히 공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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