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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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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참회록’에는 짤막하면서도 인생의 예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메마르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목이 마른데, 느닷없이 사자가 나타나서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급한 김에 곁에 있는 작은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우물에는 물이 바짝 말라 있었는데, 안에 있는 돌담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그 밑바닥에는 커다란 뱀이 입을 쩍 벌린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고 다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위경에 처한 나그네는 우물 안의 돌담 사이에서 자라난 조그만 관목을 발견하고, 그 가지에 매달리면 잠시는 버틸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갖습니다. 다행히 그 관목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 위를 보니까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그 나뭇가지를 갉아먹고 있어서 머지않아 연약한 가지는 부러지고 말 지경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그네는 옆에 있는 나뭇잎에 몇 방울의 꿀이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그 꿀을 보고 기뻐하여 꿀맛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떨어져서 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이 한 토막의 이야기는 인생의 단면을 의미 있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산다는 것은 꼭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곤고한 나그네 인생길

  메마르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가는 나그네는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온갖 풍상을 겪다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인생은 이 지구라는 행성에 왔다가, 잠시잠깐 머물면서 삶의 온갖 애환 속에서 웃고 울며 쫓기다가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나그네지요. 어느 날 그 나그네에게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습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도서 9:12)

  인생의 노정 속에서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재앙이 찾아오고 풍파가 몰아닥칩니다. 정든 사람이 죽는 일이 생깁니다. 진한 슬픔과 삶의 덧없음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별리의 아픔을 만납니다. 쉬 잊혀지지 않아 가슴을 앓습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살아야 하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부담과 갈등 속에 빠집니다.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나 뜻밖의 재난이 찾아옵니다. 좌절과 비관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입시나 사업에 실패합니다. 인생이 다 무너지고 앞길이 꼬이는 것 같습니다.  방탕한 삶과 더러운 죄 속에 빠집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은 대로 걱정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기계처럼 일하며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삶이 피곤합니다. 삶의 권태와 고독이 저며듭니다. 왠지 우울해집니다. 이 책 저 책을 읽어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보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들어봐도 그저 그렇습니다. 사는 목적이 없고, 사는 게 무의미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갈등, 문제, 어두움이 있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8)

  죽음의 공포가 그림자처럼 덮여오지만 철학도, 종교도 내게는 시원하고 만족스런 답이 안 됩니다.  사람은 많은데도 외롭습니다. 인파(人波)는 거리마다 쏟아지는데, 언제나 혼자입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정답고 반갑기보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고, 사람 때문에 피곤하며,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거리의 인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지쳐 있습니다. 영혼이 피곤해 있습니다.
‘내가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며 이상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인생에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와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을 떠나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인생들의 발길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을 등진 인생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동 장치인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장 14절)

나그네는 사자를 피해 급히 물 없는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는 안전할 것이라 믿고, 그 안에서는 잠시나마 쉬면서 마른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서.  급한 김에 우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엔 삶의 갈증을 풀어줄 생수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무시무시하고 징그러운 뱀이 또아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쫓기듯 우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밑바닥에, 그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살펴보지 않은 채 말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1)

  물질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만족이 있는 줄 알고, 학문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진리가 있는 줄 알고, 도덕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보람이 있는 줄 알고, 명성이나 권세라는 우물 속에 참된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종교라는 우물 속에 참된 구원이 있는 줄 알고 일단 뛰어들어갑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들어간 그 우물 밑바닥에는 또 다른 절망, 또 다른 괴로움, 또 다른 두려움, 또 다른 목마름이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관목에 매달려 있는 나그네!  그 모습이 소망없고 피곤한 인생이요, 죽음의 세계로 떨어져야 할 인생임을 알면서도 바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요?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2:22-23)

  나그네가 잠시 위를 바라보니 두 마리의 쥐가 쉴새없이 관목 가지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밤과 낮이 뒤바뀌면서, 무정한 세월이 우리의 인생을 부지런히 재촉하고 있듯이 비정한 시간이 유수처럼 흐르고 ‘늙어가는구나. 죽음이 오는구나. 끝이 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그늘져 옵니다.  정신없이 쫓겨온 인생. 언젠가 부러질 관목 가지 하나를 붙들고 있는 인생.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미리 뛰어내릴 수도 없습니다. 나뭇가지를 놓을 수도 달리 잡을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길이 없어 사방을 두리번거려 봅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도서 1:13)

  그 때 옆에 있는 나뭇잎에 몇 방울의 꿀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 꿀이다. 꿀이 있다.’ 나그네는 기뻐하며 꿀맛에 빠져듭니다. 자신이 처한 위태로운 형편을 잊어버린 채 꿀을 핥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오고 있는데도 돈맛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제 잘난 생각에 빠지고, 부질없고 허망한 욕망에 빠져 있습니다.  살겠다고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럽고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꿀을 빨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이 혹시 욕망에 젖어 사는 당신의 초상화는 아닐까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언 14:12-13)

  결국 나그네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고, 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당신도 언젠가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길고 긴 인생인 것 같지만 잠깐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하는 대중 가요처럼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울어집니다. 인생도 아침 나절에 잠시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미인도 늙어가고, 건장하고 힘 있던 장사도 늙어가고 죽습니다. 귀하고 똑똑한 사람은 안 죽습니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고, 찼다가 기우는 달은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모습인 줄은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오전 11시에 죽는 것과 오후 6시에 죽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어떤 하루살이는 행복하고, 어떤 하루살이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씨앗 하나가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말라 죽는 것과, 당신이 나서 살고 늙어 죽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사야40:6)

대체 산다는 게 뭘까요? 답이 없는 것일까요? 길이 있을까요?  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왜 사는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삶의 목적, 삶의 이유, 삶의 가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삶의 귀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북망산을 향해 가는 세월 속에 당신의 인생을 떠내려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 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시편 49:10-12)

사람들은 소유를 늘리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즐겨보고 으시대 보지만 진정으로 행복스럽지가 않습니다. 지식과 문명은 급속도로 발달해도 세상은 더욱 어지럽고, GNP는 증가했지만 행복의 양이 증가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즐거움과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늘어났지만, 심령은 여전히 피곤하고 불안하며 허무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온갖 건강 식품과 불로장생의 보약을 먹지만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즐겁게, 부유하게, 안락하게 살았던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결과 그런 사람은 태평성대의 왕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왕들 중에서도 부귀영화와 권세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살았던 왕이 있는데, 그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도서 2:25)

그의 시대에는 금을 돌같이 흔하게 썼으며, 또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자그마치 1,000명이나 있었을 정도로 부귀영화가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는 물질과 육체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렸습니다. 전도서 2장을 읽어보시면 그의 삶이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산 뒤에 그 심령에 깊이 남는 것은 “모든 것은 헛되도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느끼고 깨달은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였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3)

몽고의 징기스칸은 말라리아에 걸려 객사하였습니다. 천하를 주름잡던 왕도 모기 한 마리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일찍이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인간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습니다.
  서른두 살의 짧은 생애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 측근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을 때, 손을 땅 밖으로 내놓고 묻으라. 그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 손으로 갔다는 것을 교훈으로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 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도서 2:22-24)

세계의 3대 영웅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시이저, 나폴레옹의 최후를 생각해 보면 <성주풀이>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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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똑똑한 사람이나 힘있는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절세미인이나 다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갔습니다. 모두 죽음을 향해 갔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도서 5:15-16)

신기루와 같은 욕망의 종이되어 살다가 덧없는 생을 마감한 저 많은 인생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또 그 길로 달려갑니다. 그 길의 끝을 주목해 보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그리스도인의 색다른 간증이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디 엘 무디는 1837년 2월 5일에 태어나 1855년 4월 21일에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40여 년 간 복음을 위해 살다가 영원히 밤이 없는 나라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소에 야망의 사람이었다. 무엇에나 만족함이 없었고, 항상 보다 큰 것을 향해서 나의 야심을 불태웠던 사람이다. 지난 40여 년 간 나는 내 모든 야심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따라서 나의 가족을 위해서는 물려줄 재산이 없구나. 다만 물려줄 것이 있으니,내가 하던 하나님의 사업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계속 지원하실 것이다. … 오늘은 내가 전도 사업을 마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 여보,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오. 잠시 동안 당신과 헤어지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도 슬픔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는 이런 소망,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시편 107:10-12)

철학과 종교에도 해답은 없었다.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인생은 없이 사는 것이 많은데, 10대에는 철없이, 20대에는 겁 없이 살다가, 30~40대에는 정신없이, 50~60대에는 빈틈없이 살고, 70대에는 아무 낙 없이 살며, 80대가 되면 형편없이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황천객이 된다고요.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음 앞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음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지요.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느냐고요? 저는 사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활동은 죽음이 오기까지 그 죽음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망 선고를 받고 태어납니다.
  어느 날 ‘죽음’ 이라는 불청객은 예고없이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죽음은 예방 주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뜻과 상관없이 여러분을 찾아올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의 인생에 끼어들기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불쑥 당신의 인생에 끼어들 때 당신의 영혼이 가야할 곳을 미리, 분명히 모르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삶의 미로에서 헤매며 불안과 혼돈 속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지으신전능자를 만나 영혼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은 결코 삶의 근본적인 의문들을 풀지 못할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예레미야 38:16)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금화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봐 잉크병 속에 감추어 두는가 하면, 지폐는 침대 밑에다 두었습니다. 편지를 받았을 때는 행여 무슨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 있지나 않나 해서 뜯기를 주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밤에는 실탄을 장전한 권총과 단도를 가까이 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60년에 사망한 그는 가사 상태로 매장될까봐 두려워하여 소정의 시간 이상으로 오랫동안 관을 열어 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살려고 하는 의지’에서 나타나는데, 이 ‘살려고 하는 의지’는 사악한 것이고 모든 고뇌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 고뇌로부터 해방되려면 금욕적인 생활과 불교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 철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채 한없이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공원지기가 문을 닫기 위해 들어와서 경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웬 노인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석상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해가 저물었습니다.”
“……”
“아, 할아버지 가셔야 할 시간이 되었어요. 일어나십시오.”
“……”
“아니, 이 영감님이 귀를 잡수셨나? 영감님, 어디서 오셨어요?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공원지기는 쇼펜하우어의 귓가에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제서야 쇼펜하우어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멀거니 눈을 떴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소? 내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요. 돌아가야 한다고 했소? 인생은 저물고 있는데,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구려.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쇼펜하우어는 깊이 탄식하며 공원을 나섰답니다.
하나님을 떠난 철학,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상은 결코 우리의 빈 마음을 채우거나, 풀어줄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는데, 인생이 어떻게 자신을 정확히 알겠습니까? 자신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 있어야 자신을 보고 알 수 있겠지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은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바르게 알려면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볼 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는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성인 싸르뜨르가 폐수종 때문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임종 한 달 전부터 소리를 지르고, 문병 온 사람들을 향해 고통스런 절규를 토했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처럼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부짖었습니다. 그의 아내를 비롯하여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어떤 사람도 죽음의 문 앞으로 가는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자 프랑스의 신문들은 “싸르뜨르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그렇게도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가 왜 그렇게 불안해 하며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가?”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문에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싸르뜨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뜨르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쇼펜하우어도 싸르뜨르도 영혼이 돌아가 쉴 수 있는 고향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원한 실향민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계로라는 공자의 제자 한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敢問死)”
 “未知生이니 焉知死리요?” (삶도 모르겠거늘 죽음을 어찌 알리요?)
 공자도 삶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는 또
“朝聞道 夕死可矣.”(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노라.)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논어>의 술이편에서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是吾憂也 ”라고 탄식했습니다. 즉, 덕이 닦아지지 않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않는 것과, 의(義)에 대해 들어도 자신의 마음과 삶을 능히 옮기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음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도(道), 즉 진리를 찾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을 닦았던 철인의 한계요,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학문이나 철학도 당신의 이정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 안에 당신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인생의 황혼이 오기 전에 분명한 삶의 이정표를 발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당신에게 다음처럼 권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성경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와서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당신도 틀림없이 이 말씀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흙으로, 모든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20)

  이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부터 계속해서 당신의 마음 안에서 메아리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청운의 뜻을 품고, 해가 바뀌면 새로운 한 해를 꿈꾸며,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고 애써 보지만, 뜻은 무너지고 꿈은 깨어져 늘 아쉬움과 후회가 남습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일생 동안 자기 뜻대로 태어나,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생에 길이 있고, 소망이 있고, 만족스러운 해답이 있을까요? 예, 길과 소망이 있고,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어디에 있느냐고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고, 당신의 빈 심령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혼에 참된 소망과 안식, 영원한 생명과 능력을 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다지 관심없이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코웃음을 치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식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타락한 종교인들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혀 있거나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참된 하나님의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고 올바로 소개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든 이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인생살이가 힘들고 피곤하며 허무한 것은 배우지 못해서나 가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나 성격이나 환경이 나빠서도 결코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노력이나 각오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인생에게 곤고함과 어두움과 수고로움이 온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부귀 영화에 의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기 22:21-23)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분께 귀의하여 당신의 모든 불의, 곧 죄를 사함받게 되면 당신은 영적인 눈이 떠지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바른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아직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참된 행복은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나 지식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로워진 사람, 하나님께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맛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로마서 4:7-8)

  이런 사건, 이런 역사(役事), 이런 은혜가 당신의 마음에 임할 때 당신은 가난해도, 무식해도, 질병이나 절망 속에 있어도, 연약해도,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달라지고 새로워지고 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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