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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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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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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 P. 바커
    W. E. 포웰 H. P. 바커의 대화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는 것은 모든 참된 신자들의 즐거운 특권입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견고하고 안정되게 하나님과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이 놀라운 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으로 불타게 만들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 주제에 대한 교제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참된 평강"과 "거짓 평강"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실 이 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짓 평강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헛된 낙원에서 살면서, 자기 영혼에 대해 부주의하여 아주 두려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귀의 최면에 걸려 잠을 자면서 사업과, 일, 쾌락, 친구, 염려, 죄에 젖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참된 평강인 거룩한 평강, 하나님과의 평강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나 무관심이 아니라 그가 위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앎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자신의 상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의 극악함 즉, 자기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반역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어주셨고 또한 그들을 의롭다하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에게 그의 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내 죄는 없어졌습니다. 내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 맡겼는데 주님께서 자기 피로 그 모든 죄를 갚아 주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영광 중에 계십니다. 내 죄를 지셨던 그분께서는 더 이상 내 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갈보리에서 자유케 되셨는데 주님께서 자유케 되셨기 때문에 나 역시 자유케 되었습니다." 당신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평강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평강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일에 대해서는 평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그렇다고 믿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 가난한 사람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음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염려와 필요에 대해 평강 가운데 그렇게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조금 대화를 나눠보니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자기의 상태에 대해서는 평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기에 때때로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두려움에 괴로워 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상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해 주신 사역에 의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의 참된 평강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있는 문제와 염려에 대해서는 평온과 평강을 누리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죄와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평강한 가운데 인생의 풍파를 헤쳐 나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평강에 대한 비밀을 깨달은 적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과 구원의 확신은 같은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전해졌던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당연히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종종 율법이나 유대인의 규범들과 혼합되어 왜곡된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자기의 소망을 쌓아가지만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확신과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39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와 같은 잘 알려진 구절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의심이나 두려움과 싸울 때는 이러한 성경구절들이 얼마나 효력 있는 무기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강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이러한 귀한 성경 구절로 인해 보호받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라져 버렸기에 모든 죄에 대한 고발에 대해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불안한 요소들이 다 제거되었기에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해보겠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아주 많은 소를 방목하고 있는 목장 한가운데에 있는 집에 살았고 있었습니다. 그 집과 마을은 그 목초지 한 가운데 나 있는 길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소를 매우 무서워하는 한 숙녀와 함께 마을에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길이 소 떼 사이로 곧장 나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두려워하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그 숙녀에게 내가 아주 여러 번 그 길을 다녔지만 한번도 소 떼에게서 사나운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해롭지 않으며, 그녀를 따라 오기 보다는 도망갈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숙녀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 길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한 모습이었지만 점점 더 담대해졌습니다. 내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시켜 주었을 때 그 말을 믿었고, 정말로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녁 늦게 마을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모든 소들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숙녀는 얼굴에 미소를 띄면서 "와, 소들이 다 가버렸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예, 그렇지만 그들 옆으로 지나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럼요, 그 소들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소들이 다 가버려서 정말 기뻐요"라고 그 숙녀는 대답했습니다.
이제 저는 구원의 확신과 평강의 차이에 대해 이 예화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면,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이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이 사라져버리고,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완전히 만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평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원인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사역입니다.


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고 있지 못하나요?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신자들이기 때문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두 제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참된 제자들이었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셨을 때에는 불신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고 주님의 보혈에 그들의 소망을 두고 있지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복음을 더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역에 의해 그들의 모든 죄가 영원히 용서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모든 죄과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거만한 거인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 두려움 없는 젊은 사람을 보고 한 이스라엘 사람이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나는 저 젊은이를 믿네. 나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구해주실 것이라고 믿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분명히 다윗을 믿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에 구원의 소망을 둔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승리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손에 들고 진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그 사람은 근심 어린 얼굴로 자기 진에 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는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을까요? 왜 감사의 노래를 높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 함성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다윗은 믿을 만한 구원자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구원을 이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대적은 사라졌고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평강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만한 구원자로서 믿고 있지만,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의 결과를 완전히 깨닫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속히 눈이 밝아져서 평강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점유도 또 다른 불안의 요인입니다. 세속적인 마음 역시 평강을 누리는데 있어서 커다란 방해물입니다.


한 죄인이 하나님과 평강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인가요?

언제나 늦습니다. 이미 2,000년이나 늦은 것이지요. 사실 한 죄인이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룬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무엇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누림으로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단번에 영원히 평강을 이루셨습니다(골 1:20).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넓은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역에 속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해야할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평강을 이루려는 노력을 그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주어진 결과를 자기 것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시편 119:165에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평안은 "하나님과의 평강"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있는 "법"이라는 말은 십계명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을 계시해 주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지혜와 의와 평강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 길을 아는 지식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이 복을 누리는 것으로 영향을 받지만 그 지식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구약 성경의 별빛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햇빛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 주셨고, 하나님의 계시의 궤도에 속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실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복되신 성령님께 순종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우리의 복으로 이끌어 가시도록 허락을 한다면, 틀림없이 다윗의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사랑한 성도들처럼, 우리도 큰 평강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8:6에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안을 의롭게 됨으로써 얻는 로마서 5:1의 화평(평강)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 평강은 때때로 우리 자신의 냉랭함과 죄악됨에 대해 염려함으로 생기는 자기 불만의 무서운 상태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과의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인가요?

로마서 4:25와 5장 1절을 연결해서 보시면 그 구절들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연결됩니다. 하나님과의 평강은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정한 요구가 모두 만족되었기에,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강"과 빌립보서 4:7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과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평강"은 우리의 죄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된 상태와 관계 있는 것으로, 이 평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고난과 시련 속에 있는 우리의 생활 환경과 관계 있는 것으로,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말씀드림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을 짓밟아 버립니다. 그가 자기의 죄에 대해 하나님과의 평강을 갖고 있을지라도, 이 시련과 슬픔의 세상을 지나기 위하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게 되는 습관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하면 그의 마음과 생각이 평강으로 지켜질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 안에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해 염려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정해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확신과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4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7에서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켜진다 할지라도 생활의 어려움이나 시련은 그들이나 회심치 않은 사람들이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핍박이나,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들이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실 배척과 우리를 떠나게될 것을 내다보심으로 "주님의 것"인 우리가 당할 대립과 욕, 핍박 그리고 비난을 예상하심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을 위해 이 모든 핍박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하늘의 평안인 주님의 평안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그들에게 배척과 슬픔의 곳이 된다면, 그들을 위해 하늘에 "많은 거할 곳"이 준비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고난이라는 유산을 남겨 주셨다면, 그와 함께 평안이라는 귀한 유산이 따라올 것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며,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네 가지 평강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1. 하나님과의 평강은 우리의 죄와 죄악된 상태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얻게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롬 5:1).
2. 내적 평강은 불건전한 자기 불만과 대조되는 것으로 "성령의 생각"이 주는 것입니다(롬 8:6).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매일의 삶에 근거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겪는 일상 생활 가운데 있는 짐과 염려를 주님께 맡겨드림으로 그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평강입니다(빌 4:7).
4. 그리스도의 평안은 주님께서 떠나가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나타내도록 또한 주님의 이름을 위해 비난과 핍박을 당하도록 남겨진 자들에게 주신 귀중한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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