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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생활

최고관리자 0 4,047
예수님의 기도생활

먼저 누가 복음의 한 구절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중 하나가[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하고 말씀드렸다.
물론 이전에 제자들이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거나 그제서야 처음 기도 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혹은 거의 모두가 이미 기도할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경건하고 소박한 가정에서 자라난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요한은 틀림없이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기도하는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누가 복음에 나타나 있는 이 요청이 이루어진 때의 특수상황이다.
이 요청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다가 기도를 막 끝내신 때였다.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들 기도의 차이를 종종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즉 예수님의 기도가 매우 확신에 차 있으며 강력하고 실제적인 기도였음에 비해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나약하고 더듬거리며 자신이 없는 기도였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포괄적이고 하나님에 의하여 감동된 것이며, 설득력 있는 기도였고, 그들의 기도는 종잡을 수 없고 충동적이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감당할 수 없는 경외감과 함께 그 차이가 그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라고 한다면 그들은 아직 기도의 기초 원리들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벼란간 느끼게 되었다.
저녁 예배가 끝나자 그들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려 하시지 않은 것처럼 기도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논증하려 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논증으로 증명될 수 있는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하시는 분이며, 신앙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논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영혼의 생태적인 호흡인 것이다.
기도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이며 바로 인간의 구조 속에 조성된 것이다.
기도의 원천은 논증이 미치는 영역 저 아래 깊은 곳에 놓여 있다.
또한 기도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만드신 인간의 마음 속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언제나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문제에 대해서 결코 논증하려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기도 생활이 어떤 의미에서 반발할 수 없는 논증이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제자라도 예컨대 도마 같은 제자가 기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진적이 있었다면 예수의 강력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고 삶의 심오한 것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찰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라면 자신의 불확실함 보다는 예수님의 확실함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의심보다는 예수님의 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것은 극히 귀중한 원리이며 더우기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 비중이 크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기도생활 앞에서 의심은 사라지고 해소되어 버린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이 기도 자체제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논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기도 문제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교훈과 함께 몸소 실천하심으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다.
즉 기도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의도적인 교훈을 주신 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 자신의 생활로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 이 두가지 면을 서로 분리시켜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점에 있어서 이 두가지 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 자신의 은밀한 기도생활에서 나온 열매이며 그의 기도생활은 단순히 그 교훈을 행동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두가지 면을 동등하게 그리고 구별없이 취급해야 할 것이다.

주의를 요하는 세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기도는 예수님께서 그의 일상 생활에 항상 지니고 계시던 그의 일과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세째로 [주기도문]는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교통은 물론 간구도 포함하고 있으며, 감사는 물론 남을 위한 중보 기도도 포함하고 있다.

2. 하나님을 뵙는 생활
기도생활은 예수님의 일과로써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나고 계시던 일면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모든 복음서들의 거의 매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이 아직 잠든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시기 위해 일어나셨고,그의 영혼이 지치도록 쉴새 없는 고된 하루가 끝난 후에 하나님과 함께 온 밤을 지새우셨다(막 6:46).
또한 무리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조용한 것을 방해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우성일 때 예수님께서는 잠시나마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기 위해 그의 마음과 생각을 하늘로 향하셨다.(막 7:34).
이러한 사실이 각 복음서의 매 장마다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생활 대부분이 열 두제자는 물론 가장 가까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까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복음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덧붙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란 단순히 그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였으며, 바로 그의 존재의 호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요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예수님의 기도생활은 결코 기분에 좌우되지 않았다.
물론 예수께서도 감정의 변화를 겪으셨다.
예수님은 결코 감정 없는 금욕주의자(stoic)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기쁨과 슬픔,웃음고,눈물,황홀한 기쁨이나 피로에 지치는 일도 겪으셨다.
그러나 그의 온 마음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마치 지남침이 북쪽을 가리키듯 언제나 기도로 향하셨다.
기도는 천지간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분과의 교통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셨으며, 밤이나 낮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사랑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셨다.
감정에 움직이는 기도는 생활의 실패를 초래한다.
기도생활의 실패는 예수님을 본받지 않은데서 초래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도 실패가 없었으며, 감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다.
즉 기도의 실패는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징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사랑을 바치라고 하신다.

보통 기도생활을 질식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의 분주함이다.
매일 매일이 할 일들로 가득차서 기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럴 경우 종종 일 그 자체가 기도라든지 혹은 성실기도 중 하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밀려나는 것쯤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등의 변명을 구실로 내 세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라.
우리의 나날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예수님의 나날은 더욱 그러했다.
마가복음의 처음 몇장을 읽어보라.거기서 예수께서 그 사역 기간중 보내신 전형적인 나날,즉 매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나날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연구해 볼 때, 어떻게 한가지 일이 끝나면 또 한가지 일이 쌓이며, 병든 자와 상한 죄인들이 어떻게 밤늦게 그에게 나아와서 모두 도움을 받고 떠나갔는가를 살펴 볼때, 과중한 힘의 사용과 소모로 그의 힘이 그에게서 모두 빠져 나가는 것을 거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날일수록 예수께서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 앞에는 구원해야 할 세상이 있었고, 그 혼자만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었다.
인간의 사상과 도덕에 있어서 철저한 혁명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혁명의 도구로는 그 자신의 몸과 영혼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꾼(toiler)이었던 그는 또한 시간마다 하나님을 뵙는 일에 있어서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이 되셨다.
일 자체가 기도란 변명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면 비록 그것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로 하여금 기도를 대신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결코 찬성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그 실천의 요점은 아무 것도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것이다.
사람의 생활이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문을 닫고 무릎을 꿇을 시간을 만들어야 하며, 또한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종종 기도를 방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간의 조급함이다. 그들은 첫번째 노크에 문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문두드기를 그치고 돌아서 버린다.
예수님의 경우는 이것과 얼마나 다른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히5:7).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뜻 만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의 마음과 뜻과 혼의 전힘을 기우리는 투쟁적이고 심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 밤중에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 관한 위대한 비유에서 비쳐나오는 것과 꼭같은 진리이다(눅11:5이하).
예수께서는 그를[염치없는 자](5절)라고 부르고 있으나 바로 그 다음에서 그의 염치없음을 칭찬하고 계신다.
사실상 그는 [그러한 것이 바로 기도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신다.
[거절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 두드리라! 하늘 의 문을 두드리라!]
물론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시기 싫어 하신다거나 그의자녀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인색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뜻 하신 바는 마음 내키지 않는 냉담한 기도는 무익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은 때때로 인간의 극성스러움이 그의 진지함을 증명하는 때라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나아와 그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간청하는 사람들 즉 떠나기를 거절했다 수로보니게 여인(막 7:25이하).어떠한 위협과 제지에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을 그치지 않았던 길가의 소경 바디매오(막10:46),길이 막힌 것을 알고도 실망하여 떠나지 않고 지붕을 뜯었던 사람들(막2:4이하)에 대해 예수께서 항상 특별한 사랑을 가지셨던 것은 여기에 하나님께 통할 수 있는 바로 그 정신이 있었고 참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조급함은 기도에 있어서 금물이다.

끝으로 도덕적 난제(difficulties)들이 때때로 인간의 기도를 저해한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자신의 생활속에 우리가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도덕적 결정이 미해결로 남아 있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약화되며, 비현실적으로 되어간다. 온전한 도덕적 순결의 배경은 기도의 첫째 가는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전기학자는 자동적으로 접촉을 단절하여 전류를 끊는다는 뜻으로 절연체라는 물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절연체이다.
시편 기자는[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66:18)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도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의 근원이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명백히 이것이 기도를 저해하는 요소라 되지 못했다.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당하셨으나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죄의 그림자에서부터 깨끗하게 지키셨다.
마음의 순결은 하나님을 본다.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순결이 항상 끊임없이 하나님을 뵈었다.
아무 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의 접촉을 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것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기도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니고 계시던 면이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번째 중대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제 그 두번째로 넘어가기로 하자.

3. 기도와 위기
예수님은 그의 생애중 중대한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어느날 그의 일생 사업에의 갑작스런 부름이 있었다.
누가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눅 3:21)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사명(vocation) 에 관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최초의 사도들을 선택할 결정의 때가 왔다.
누가는 그 결정이 내려지기 전날 밤을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6:12)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가르침(guidance)를 받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루는 열두 사도가 전혀 나올 가망이 없어보이는 귀신들린 자의 아주 어려운 경우를 만나 모두가 좌절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망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그 일을 예수님께 맡겼을 때 치유의 역사가 있어서 그 악령이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였다.
여기에서 그는 능력있는 이적을 위한 힘을 받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은밀한 곳에 계실 때 어둠의 권세와 그 때가 닥쳐와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려는 유혹이 극심해졌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괴로움 중에 있어 기도하셨다](눅22:4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보리에서 못박히시던 때 그 고통이 거의 끝나가고 모든 힘이 빠져나가며 요단강물이 그의 발치에서 넘길거렸을 때 예수님게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눅23:46).

여기에서 기도하면서 죽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생애의 모든 중대한 위기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셨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최초의 추종자들과 그 밖에 다른 모든 추종자들에게 영원한 표본이 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이겨 극복해 나가신 이러한 위기들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닥아올 것들이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라면 그의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생의 사업을 시작할 때에나 생에 있어서 중대한 결정의 순간에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유혹이 그를 공격할 때 승리하기 위해,그의 생애에 밤(죽음)이 닥칠 때에,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리스도와 같이 기도에 깊이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4. 기도의 제요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가 보여 주는 셋째번 중대한 사실을 살피기로 하자. 주님께서 하신 기도들은 그 속에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 즉 영교,감사,간구,중보 등을 가지고 있었다.

영교 : 가끔 예수님께서는 그가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은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셨다.
누가는 그러한 경우의 하나를 묘사하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셨다](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것이 영교의 기도이다.
그 때에는 마음과 마음이 맞으며 변화산에 있던 예수님의 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과 말씀하셨으며, 그 완전한 친교의 시간이 너무 깊고 부요하며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광채와 기이함을 얼굴에 지닌 채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는 얼굴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단순히 기도를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우리에게 주는)경고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사이의 우정을 단순히 편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며, 도움을 바랄 때만 친구에게 접근하고 그 밖에 다른 때에는 전혀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런 물질적 이익만을 바라는 관계에서는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근거 위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요청할 것이 없는 때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은사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 앞에 나아가게 하신다.
이것이 영교가 맺어지는 기도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이러한 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만나 주시며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 속에 뚫고 들어오는 복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사람은 그 전생애가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의 광채를 지니고 변화하게 된다.

감사 : 또 다른 하나의 요소는 감사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감사로 가득찬 기도였다.
때때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했던 것을 찬양과 감사였다.
종종 기도의 특징을 이루는 불평이나,항변이나,투덜대는 어조를 예수님의 기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흘렸던 것은 언제나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이었다.
그리고 햇빛처럼 밝은 생활만이 그의 입술로 하여금 감사의 외침을 말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에 어두움이 덮혔던 때에도 그의 감사는 식어지지 않았다.
그의 부서질 몸의 상징인 부서진 떡을 취하신 후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9).그는 잔을 취하신 후 그 잔 속에서 자신의 피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
그는 다락방에서 부터 겟세마네 땀과 고통속으로 찬송하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나아갔다(막 14:26).
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예수님의 입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그치지 않았으며,십자가 마저도 이를 침묵케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기도의 또 다른 요소는 간구이다.
우리가 이미 상본대로 하나님께 은사들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주님의 기도 생활의 전부가 아니었으며,주요 부분 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흘러서 이러한 간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에 와서 특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명확하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형태의 기도이므로 성숙한 신자의 신앙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구를 깎아 내리려는 위험한 경향을 오늘날 소위 진실하다는 기독교인 가운데서 조차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단호히 부정해야 한다.
간구의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은 다음의 분명한 사실에 부딪칠 때 산산조각이 난다.
즉 예수님께서는 결코 간구를 유치한 것으로 내어 버리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간구를 장려하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간구기도를 활용할 것을 권고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첫 두마디[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눅11:2)에서 이 사실을 아주 못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참으로 그의 자녀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명확하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간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가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간구는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제일의 조건인 [당신의 듯이 이루어지이다](마6:10)에 항상 지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열망하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는 거절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강조하려는 주안점은 간구기도를 깎아 내리려는 경향은 첫째로 믿음의 결핍을 표시한다는 사실이다.
이 경향의 근원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속박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 그 자신의 세계 속에 사로 잡혀 포로라는 사상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자유로우시며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항상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것이며 그 요구를 하나님의 보좌에 바로 직고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에는 중보적인 기도가 많이 들어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막10:16).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그으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눅23:34).그
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요12:9).
그는 유다를 위해 기도 하셨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얼마나 무섭게 기도로 씨름하셨는가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만이 아신다. 어느날 제자들과 계실 때에 외쳐 말씀하시기를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밀까부르듯 너희를 유혹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눅22:31-32)라고 하셨다.
또한 이러한 중보기도의 영원한 팔이 그를 받치고 지탱하고 있음을 안 것이 베드로에게 어떤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의 추하고 한 없는 범과가 우리와 함께 자라나고 우리의 호흡과 함께 시작하였을 지라도 영원한 중보의 팔을 드소서 예수,
가장 인간이셨을 때 가장 신성하셨던 분이여!

또한 꼭같은 중보의 제사장직의 예수님에 의해 모든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생활 연구에서 맺어지는 실제적인 결론을 기도는 모든 참 종교의 심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최선의 삶,그리고 고상한 삶의 동력과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들이 [유혹의 나라를 지날 때에 [손과 시선을 높이 들고 높이 계신 분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무릎 꿇은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가까이 가보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말을 끝낼 때까지 그들은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말을 끝낸 후 그 사람은 일어서서 천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들이 멈추거나 넘어지는 곳에서 걸어가거나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견인씨](Mr.Standfast)처럼 자주 무릎을 꿇고 위에 계신 분께 열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승리의 비결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방법을 습득한 사람이다.
그들은 강한 데서 더 강한 데로 나아가며 모두 시온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를 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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