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그는 ‘성공한 다기’를 보여주더군요. “쪼르륵”하고 사발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더군요. 사발의 내부에 물이 스미는 겁니다. 마치 화선지가 물에 젖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색깔도 달라지더군요. 그걸 ‘다완’이라고 불렀습니다. 도공은 말을 이었습니다. “잠시만 지나면 찻사발의 바깥면도 젖을 겁니다.” 실제 그렇더군요. 사발 내부의 물이 스며들어 바깥쪽 면까지 적시더군요. 놀라운 건 또 하나 있었죠. 그 찻사발을 잡아도 손에는 물이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 선생은 “이게 바로 숨을 쉬는 사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다심(茶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차의 마음과 다기의 마음이 둘이 아니란 얘기였죠. 그 얘길 듣고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다기가 ‘영성’이나 ‘선(禪)’과도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저는 그게 가마 속에 놓인 다기의 심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가마의 온도는 1300℃까지 올라간답니다. 무시무시한 열기죠. 만약 우리가 가마 안에 놓인다면 어떤 자세를 취할까요. 그렇습니다. 웅크리겠죠. 자신을 꼭꼭 닫으려 하겠죠. 살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죠. 오히려 온몸을 여셨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까지 올렸습니다. 쇠붙이도 녹이는 가마의 열기에 온전히 ‘나’를 맡긴 셈이죠. 사발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마음을 열고, 몸까지 열지 않았을까요.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숨을 쉬는 사발’로 다시 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찻물이 스민 사발을 조심스레 두 손에 올렸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떠올랐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아마도 그게 사발이 숨 쉬는 이유가 아닐까요. 나를 죽이고 다시 일어선 생명, 다기에겐 그게 일종의 ‘부활’이었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