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복의쉼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직자로 산다는 것

이경숙 0 4,033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직자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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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옥스퍼드대에서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로도 유명한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 김영사에서 번역 출간되어 화제다. 가격도 만만치 않은 그의 책이 출간된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2만권을 훌쩍 넘어섰으니 아무리 아프간으로 빚어진 종교갈등이 우리 사회의 이슈라 하지만 관심의 정도가 예의 그 범위를 넘어섰다고 볼 때 가벼이 볼일은 아니라고 본다. 말하자면 18세기 19세기에 유럽을 강타했던 반기독교적 정서와 연대가 우리 한국사회에 깊이 광범위하게 촉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인도에서 빈민들과 고아들을 위해 50년 가까이 헌신했던 테레사 수녀의 신앙고백 문건이 출간되어 어찌했든 성직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들 아는 대로 ‘지난 50여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의 부재의 의식 속에서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과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직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대한민국에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교회의 목사로서 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이 간단치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이 다 그러했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학교 문을 두드렸을 때의 목회자 후보생들이었던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순수하고 정결한 헌신의 열정으로 가득찼던 젊은이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목사가 되어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의 그러한 선택에 조금도 추호의 후회함이 없으며 또한 여전히 우리는 목회자됨을 자부하고 있는가?

 


우리의 젊은 날의 그 때보다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목회환경이 변했다. 세상의 변화를 탓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목회현장과는 너무나 변해버린 여건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좌절하고 낙망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바라고 원했던 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십자가 길이었던가 아니면 시쳇말로 잘나가는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의 삶과 지위였던가.

 


지금에 와서 내 주변의 목회자들을 둘러보면 거개가 다 자녀들을 목회자 지망생으로 추천하고 후원하며 키우는 일에 대단히 인색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한 마디로 너무 고생스러워 갈 길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우리의 서있는 목회현장의 현주소이며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러는 마당에 전해진 테레사 수녀의 목회 실존적인 고백이 우리들의 마음을 강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정말 그런 것인가 - 하고 말이다.

 


테레사 수녀가 가지고 있는 커리어로 보거나 삶의 무게 또는 그의 영적 지위로 보건대 우리가 가볍게 보고 쉬 판단할 일이라 생각지는 않겠으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자격으로서 평가하건대 그의 고백은 어딘가 못마땅한 부분이 분명 있다. 그 어디의 고백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충일감과 감사함 그리고 벅차오르는 감격과 영적 희열이 도무지 감지되지 않는다. 물론 전일생이 다 그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확인하는 바이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만져주심 그리고 그분에 대한 끝없는 영적 소망이 왜 느껴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Hear my prayer, O LORD,  listen to my cry for help;

be not deaf to my weeping.  For I dwell with you as an alien,  a stranger, as all my fathers were. (Psalm 39:12)

 


마치 그의 글을 보면 존 웨슬리가 회심하기 전의 영적 상태나 심리상태가 그대로 노출된 그의 일기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더 나아가 루터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본연의 해석학적 지평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이전의 모습과 비견된다.

 


나는 그의 서신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실존적인 고민과 고백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것은 반드시 어떤 신학적 배경과 사실의 근거로부터 출발한 의문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배우고 아는 대로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되면서 소위 신인협동설의 이론의 여지를 기독교 전통 구원론에 남겨두게 되었다. 그의 요지는 바로 인간은 십자가의 구속만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 즉 인간 개개인의 희생과 헌신이 결합되어 인간구원을 달성한다는 세미-펠라기우스적인 구원적 당위를 신학 안에 안착시킨 것이다.

 


바로 그 토대 위에서 루터가 구원론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다했고 그리고 우리의 자랑스런 존 웨슬리 목사가 고통스런 구원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그 철학적 구원론의 함의라는 블랙홀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고 오늘 우리들에게 본래적이고도 본질적인 목회적 패러다임과 장을 제공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선상에서 볼 때 나의 판단으로는 테레사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고 감히 단언한다. 그의 신의 부재의식과 오순절교파의 이름도 없는 어느 성도의 하나님과의 날마다의 동행에는 어떤 현격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테레사라는 이름의 걸출한 유명세와 무명인 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인가? 거기엔 결코 인간의 공로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님의 칭의론적 구원은총의 차이가 존재한다. 기독교 구원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가을 감신대에서 8월 감리교대회의 연장선에서 치러진 기독교의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모인 모임 - 칭의론에 대한 각 교파적 입장의 통일성 재확인 차원 - 에서 분명 카톨릭 신학생이 한 질문 속에서 그것을 확인한 바 있다. 카톨릭교회는 개신교와는 다르게 거의 일반적으로 칭의론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필요성도 전혀 요구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말이다. 이것은 각자가 처한 기독교라는 신앙환경의 실존적인 고백에 있어 중대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바탕에 테레사 수녀의 고백이 있고 이해인 수녀가 동감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내가 어느 정도로 헌신하고 희생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실로 보통의 질고가 아니며 이것은 인간실존 안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이 사실을 종교는 다르더라도 불교 안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바, 도올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도 그가 여러 사찰의 스님들과 불교적인 고민들을 청취하며 해답을 구했던바 바로 어느 정도의 수양과 정진이 있어야만 해탈의 경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단히 곤혹스러워들 했다는 글이 실려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불자들이 성불이라고 치켜세우는 성철 스님의 글귀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역시도 자기 자신이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상실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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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서나 신학에서도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일식, 하나님의 숨으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관계의 틀 안에서 상관되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용어인 것이다. 기독교신앙이 고백하는 무소부재의 우주적 실재이신 하나님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더 가까운 곳도 없고 더 먼 곳도 없다. 기독교신앙의 선조들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내가 나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내게 가까이 항상 계신 분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항용 하나님의 부재를 인식한다면 그것을 어찌 기독교인의 신앙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걷는 길이 초지일관 어떤 숙명과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비의지적으로 수행되어지고 감내되어야 한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길이 또 있을까? 어떤 강박관념이 나를 짓누르고 억눌러서 그리고 나의 기질과 성품이 마다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강박증세를 여전히 지닌 채로 성직자의 길을 걸어간다면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판단하건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실제는 자기증오와 억압에 대한 심리적 은폐 증상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향해 걷는데 반해 성직자들은 어떻게 보면 불가시적이고 불확정적인 미래를 향해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분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로 부단히도 그분이 주신 뜻을 향해서 어쩌면 확신하지도 못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삶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속의 인물들이 그래왔고 지난 교회사 속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한 발걸음들을 감내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확실성을 바탕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어떠한 고난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죽음을 싸워 이겨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 놓고 감사하며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 성경 속에 있지 아니한가!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모범이 되어 그 어떠한 환란과 곤고가 닥친다 할지라도 이겨내는 힘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다.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힘의 능력 안에서 그러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우리의 자랑이었고 보상이었으며 부활이었음을 고백한다.

 


궂은비와 폭염이 멀다 않고 우리네 삶을 위협하는 속에서도 어느덧 여름녘은 물러가고 가을, 청명하고 아름다운 하늘을 보여줄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다. 기나긴 여름의 시련 속에서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가을을 염두에 둔 축적된 삶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는가? 모든 삶이 이렇듯이 질곡과 어둠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아름답고 행복한 결과가 예견되고 기다려지며 반드시 또 그래야만 하는 삶으로 모두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 누가 이다지도 어려운 고통과 시련이 서린 슬픔과 아픔의 길을 마다할 것인가?

 


성직자의 길이라는 것이 그러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그가 걸어가라 명하신 그늘을 향해 기꺼이 과감하게 행동하는 종들에게 주시는 빛이며 축복이리라. 거기에는 그 어떤 숙명도 절망도 강박관념도 없으며 오로지 선택한 의지적인 길을 좇아서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분명 쉽고 가벼우며 즐거이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50년 가까이를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헌신의 삶을 살았으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하는 고백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직자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어떤 논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단 하나의 구원의 길을 결단코 포기할 수 없다.

 


리처드 도킨슨이 가당치도 않은 기독교 교리에 얽매여 21세기를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기독교인들을 구제하고 무신론자가 되게 하기 위해 기록한 『만들어진 신』이 얼토당토 않는 허세와 자기명성을 위해 쓴 책임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자료출처/창골산 봉서방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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